조선일보 칼럼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 팩트체크, 근거가 있는 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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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일】


지난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축사를 맡은 김원웅 광복회장의 발언이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이승만반민특위를 폭력적으로 해체시키고 친일파와 결탁했다”면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친일·친나치 활동을 했다는 관련 자료를 독일 정부로부터 받았다. 민족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하나 뿐”이라고 말했다.[1] 이 발언에 있어 정치권은 친일 잔재 청산을 지지 및 환영하는 여당과 ‘반일(反日) 장사’ 및 진영에 의한 편 가르기라고 맹비난하는 야당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친일과 관련한 논쟁에 불이 붙자 이를 주제로 하는 많은 칼럼들이 발표됐다.

그 중에서 양상훈 주필의 칼럼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가 눈에 띈다.[2] “우리나라에서 ‘친일파’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고 시작하는 이 칼럼은 대한민국에서 친일파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며 또한 세계적으로 한국처럼 친일파 청산이 확실하게 이뤄진 나라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담겼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국외 사례들로서 북한, 독일 그리고 일본의 민족반역자 청산과의 비교를 들고 있다. 이승만 정부의 친일 청산이 다른 국가들의 민족반역자 청산 노력에 결코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훨씬 많은 수의 친일파를 재판으로 처벌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담긴 칼럼이 발표되자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비롯해 자유언론실천재단·새언론포럼 등은 해당 칼럼은 무지한 역사의식과 왜곡된 통계 자료 및 부적절한 비교 논리로 쓰였다는 성명을 내며 비판했다.[3] 이와 같이 양상훈 주필의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 칼럼에 대해 논쟁의 소지가 존재하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정확한 팩트체크 이전에는 양상푼 주필의 발언이 명확히 사실이 아니며 오류라는 것 또한 단언할 수 없다.

팩트 체크 방법은 칼럼 속 오류 가능성을 내포하는 발언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검증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발언 속 주장, 사용된 통계 자료 등이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이에 대한 분명한 출처가 있는지를 관련 문헌 및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검증할 것이다.

팩트 체크 이후 검증 결과에 대한 표현은 서울대학교 팩트체크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활용하여 표기하고자 한다. 전혀 사실 아님, 대체로 사실 아님, 절반의 사실, 대체로 사실, 사실, 판단 유보 그리고 검증 불가의 총 7개의 표현 중 검증 결과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용어로 선택할 것이다. 전문 팩트체크 기관의 표현법을 사용함으로서 전문성을 높이고 특정 용어를 통해 검증 결과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도록 결과물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총 8문단으로 구성된 이 칼럼은 한국의 친일 청산이 잘 이뤄졌다는 점을 논증하고 있다. 또 친일 청산이 잘 이뤄졌지만 운동권 측에서는 친일파 공격을 지속하고 있다는 내용을 주되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로 비난하는 것이 현 야당에 대한 공격이라고 믿는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친일 청산은 북한, 독일, 일본과 비교했을 때 잘 이뤄졌다며 오히려 실체가 있는 친중파에 대한 공격은 없다고 주장하며 아직까지도 ‘친일파 장사’ 가 이뤄지고 있다며 끝맺는다.

이러한 칼럼에서 특히 3, 4문단에 대해 집중해 살펴보고자 한다. 두 문단에서는 의견이 아닌 ‘사실’에 해당하는 내용을 주되게 담고 있다.

친일파 씨가 마른 나라에서 친일파 공격을 하려니 갖은 엉터리 주장을 동원한다. 대부분 거짓이다. 반일(反日) 세계 챔피언과 같은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김일성은 친일 청산을 했는데 이승만은 친일파를 등용했다고 한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선전 구호에 가까웠다. 131명이 실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누군지 무슨 재판을 받았는지도 공개돼 있지 않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친일청산법을 제정하고 559명을 체포했다. 221명을 기소해 38명을 재판으로 처벌했다. 그들이 누군지 모두 공개돼 있다.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였는데 그 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은 22명이다. 일본 전범을 처벌한 도쿄 재판에서도 기소된 사람은 25명이다. 이승만 정부 친일 청산의 10분의 1이다.

이승만이 친일파를 기용했다는데 북한에선 일본 제국대학 출신들, 일본군 출신 기술자들, 일본 기업 출신들이 모두 우대받았다. 심지어 전문직 일본인들도 특별 대우를 받았다.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은 32%인데 4·19혁명 뒤 장면 정부에선 그 비율이 60%였다. 장면 정부의 맥을 이은 현재 민주당은 토착왜구당인가. 독일 패망 뒤 서독 법무부 간부의 53%가 히틀러 나치당원 출신이었다. 그러지 않고선 정부를 운영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인간 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한국 운동권은 이런 사실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한·일 국교 협상이 친일이라지만 그때 받은 돈으로 박정희는 1대29였던 일본과의 GDP 격차를 1대3으로 좁히는 기적의 기틀을 놓았다. 이것이 극일(克日)이다.

이 부분에는 이승만 정부의 친일 청산과 북한, 독일, 일본에 대해 비교를 하고 있다. 또 장면 내각과의 비교도 이뤄졌다. 의견을 뒷받침하는 비교들에 통계 자료도 인용하고 있기에 촘촘히 팩트체크를 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먼저 본격적인 팩트체크에 들어가기 이전에 ‘친일’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친일’은 사전적인 정의로선 기본적으로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서는 친일은 한말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침략에 협조하면서 국권을 상실케 하였거나, 일제를 등에 업고 동족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한 일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이라고 정의한다.[4] 즉 일본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를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용한 사람이 있는 반면 일본의 권력에 빌붙어 전적으로 굴복한 사람이 있다는 의미다.

팩트체크[편집]

북한의 친일 청산과의 비교[편집]

북한의 친일 청산 행정적 조치에 대한 근거 확인[편집]

북한의 ‘친일 청산’은 선전 구호에 가까웠다. 131명이 실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누군지 무슨 재판을 받았는지도 공개돼 있지 않다.

양상훈 주필은 자신의 칼럼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에서 북한의 친일 청산은 국가 주도로, 대대적으로 이뤄진 정책이 아닌 선전 구호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북한에 친일파 재판과 관련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음을 근거로 들었다. 정말 북한에서 친일파 청산 및 재판을 위해 행정적 조치를 취한 근거가 없을까 그리고 그가 언급한 ‘131명이 실형을 받았는데, 그와 관련된 공식 자료가 없다’는 분명한 출처가 있는 자료일까.

-[검증 결과] : 검증 불가

◇ 친일 청산이 북한의 선전구호? 근거 불충분

북한에서 친일 청산과 관련하여 행정적 조치를 취한 공식적인 근거는 1946년 3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 ‘삼팔이북소식 북조선의 토지개혁: 삼월 말 일전까지 실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5] 북한은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방법의 하나로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 그리고 북한의 민족반역자 및 일본제국주의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일반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이어 1947년 3월 6일자 경향신문 기사 ‘친일파·민족반역자규정, 민전에서 선거권 박탈의 범위’에서도 친일 청산과 관련한 북한 정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1947년 북한은 ‘지방선거행동강령’을 발표함과 함께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선거권을 박탈했고 또한 민족반역자의 의미와 범위를 규정했다. 해당 범위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고문을 역임한 자들’ 등 총 7개로 ‘친일과 친일파’의 개념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규정했다고 할 수 있다.[6]

하지만 북한의 사회적인 정권 특성 상 북한 내부에서 이뤄진 대부분의 행정 및 정책과 관련된 자료는 대부분 공개되어 있지 않다. 특히 양상훈 주필이 언급한 ‘131명 실형’과 같은 사법부 재판의 경우 보다 폐쇄적인 영역이기에 실제 북한에서 친일 청산을 위한 재판을 진행하였는지 그리고 진행했다면 어느 정도 규모로 청산이 이뤄졌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북한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역사에 관한 학술 논문에서 전문 연구원 또한 “북한 정권은 이들의 처벌에 관한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벌이 진행되었는지 밝힌 자료나 연구도 아직 없는 형편이다.”[7] 이와 같이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이 공식적으로 친일 청산을 위해 취한 공식적 행정 조치 정도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사법 재판이 이뤄졌는가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현재 북한에서 공개한 문헌 내에서 찾아볼 수 없다. 즉 현재로서는 분명하게 팩트를 검증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친일청산이 북한에서 선전 구호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이다 또는 사실이 아니다 라고 결론내기 어렵다. 양상훈 주필이 해당 발언을 칼럼에 인용한 것에 대해서도 사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어려운, 현재로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그리하여 팩트체크의 검증 결과 또한 ‘검증 불가’로 결론지어졌다.

북한은 일본 출신 세력을 우대했는가[편집]

북한에선 일본 제국대학 출신들, 일본군 출신 기술자들, 일본 기업 출신들이 모두 우대받았다.

심지어 전문직 일본인들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양상훈 주필은 자신의 칼럼 “'친일파 장사' 아직도 재미 좀 보십니까.”에서 정확한 수치 및 통계 자료 및 출처에 대한 인용 없이 북한에서 일본인 및 친일 세력이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했다. 해당 발언이 사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 팩트 체크를 하고자 한다.

-[검증 결과] : 대체로 사실임

◇ 북한 초기 정권의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기술과 지식을 가진 일본인들이 필요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 점령 시기 일본에 존재했던 미군 첩보기구 캐논 기관이 북한 잔류 일본인들의 편지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1947년 7월에서 1948년 2월 북한에 잔류한 일본인 기술자의 수는 552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8] 일제 이후에도 북한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일본들이 남아 있던 것이다. 그들의 잔류 이유는 1946년 10월 21일의 ‘북로당중앙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 결정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 회의에서 북로당중앙상무위원회는 철도 교통부문 운영이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자, 즉각 ‘일본인 기술자들의 도주 방지’에 필요한 구체적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9]

즉 북한 정권 초기 국내적으로 미흡한 기술 보유로 인해 외국의 선진 기술을 습득한 일본 기술자들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급여가 상당히 높게 측정되었던 것도 이를 입증한다. 동북아역사논총에서 1945년에서 1950년 재북한 일본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조사한 결과 조선인 기술자 계장급이 1,500원, 광산장이 2,500원, 일반노동자·사무원이 800~1,000원의 월급을 받을 때 일본인 기술자들은 매달 3,500~5,000원 의 급여를 받았고 이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의 월 급여 4,000원을 초과하는 액수였다.[10] 이와 같은 자료를 살펴볼 때 북한에서 정권 초기 부족한 기술 기반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선진 기술을 갖췄던 일본인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대체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의 비교[편집]

서독 법무부 간부의 53%가 나치 출신이라는 통계 근거 확인[편집]

독일 패망 뒤 서독 법무부 간부의 53%가 히틀러 나치당원 출신이었다.

양상훈 주필은 칼럼에서 이승반 정부의 친일파 인사 비율에 대한 비교로 독일을 들었다. 이승만 정부 내 일제 출신 관료가 32%였던데 비해 2차 세계대전 및 독일 패망 이후 서독 법무부의 절반 이상인 53%가 나치당원 출신들로 채워졌으니 더 문제 삼을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서의 53%라는 수치가 명확한 출처가 있는 것인지 실제 나치당원들이 독일 패망 이후에도 독일 법무부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것인지 팩트 체크를 해보고자 한다.

-[검증 결과] : 판단 유보

◇ 독일 법무부 간부의 나치 당원 비율, 단순히 합산 결과로 판단할 수 없다.

독일 패망 이후 법무부 상당수가 나치 당원으로 구성되었다는 발언의 출처는 각 부서의 인사를 공식 검토한 독일 법무부 발표를 보도한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SZ)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해당 기사의 독일 원문을 찾아 살펴보니 독일 패망부터 1973년까지 법무부가 각 중앙 부서 및 하위 부서의 부서장 170명을 조사한 결과 이 중 53%가 NSDAP(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일명 나치당 소속이었다고 한다. 양상훈 주필이 칼럼에서 언급한 독일 서독 법무부 관료의 53%라는 비율은 기사의 이 부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사 내부에서는 해당 수치가 어떤 자료를 근거로 하는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아 단순히 기자 개인의 분석 수치를 가능성이 남아 있고 따라서 팩트 체크의 원문으로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리하여 기사의 근본 기반이 되는 독일 법무부 독립 과학위원회의 최종 보고서 "The Rosenburg Files - The Federal Ministry of Justice and the Nazi Era"를 통해 검증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봤다.

독일 역사가위원회의 위원장인 법학자 크리스토프 사 펠링 그리고 사학자인 맨프레드 고트메이커의 합동 연구를 통해 발표된 보고서이다. 독일 법무부 간부의 나치 당원 비율에 관한 자료는 아래와 같다.

“1949년부터 1973년까지 법무부의 고위직을 지낸 170명의 변호사 중 90명은 나치 당원이었고 34명은 SA 당원이었다. 이들 중 15% 이상은 1945년 이전에 나치 제국 법무부에서도 이 근무한 적이 있다.” (The Rosenburg Files)”[11]

해당 문헌에서 법무부의 고위직 관료를 지낸 170명의 변호사 중 90명의 비율을 계산하면 53.1%이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SZ) 및 양상훈 주필의 칼럼과 동일한 수치이다. 따라서 1949년에서 1973년까지의 독일 법무부 관료 구성원에 있어서는 53%가 나치 당원이었음이 확인이 되었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자료가 있는데 ‘1950년에서 1973년 사이에 연방 법무부의 인사 발전과 나치당과 SA의 회원 자격’에 관한 수치이다. 해당 그래프를 통해 독일 법무부 내부에 시기별로 나치당 및 SA과 관련된 간부의 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나치 당 및 SA에 소속되었던 간부의 수는 1955년 이후 가파른 속도로 축소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1949년부터 1973년까지의 나치 관련 간부의 수가 단순히 다 합쳐 몇 퍼센트인지 확인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 법무부 내부에서 나치 당원의 비율이 점차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도 해석해봐야 함을 의미한다. 독일 패망 직후에는 나치 소속의 고위직 인물의 수가 정점에 있었지만 그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되어온 양상도 확인되기에 단순하게 합산 결과로 독일 법무부 간부의 나치 청산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이에 대한 명확한 팩트 체크를 위해서는 최근까지의 법무부 간부의 나치 당원 비율에 대한 연구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전범 재판과의 비교[편집]

반면 이승만 정부는 친일청산법을 제정하고 559명을 체포했다. 221명을 기소해 38명을 재판으로 처벌했다. 그들이 누군지 모두 공개돼 있다.

독일은 2차 대전을 일으켜 수천만 명을 죽였는데 그 전범을 처벌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은 22명이다. 일본 전범을 처벌한 도쿄 재판에서도 기소된 사람은 25명이다.

이승만 정부 친일 청산의 10분의 1이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나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기소된 인원과 일본의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도쿄 전범재판)에서 기소된 인원 각각을 이승만 정부가 기소한 221명의 10분의 1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타국 사례와 비교해서 이승만 정부의 친일 청산이 상대적으로 잘 이뤄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사실인지 기소된 사람 수부터 통계에 대한 비교가 적절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검증해보고자 한다.

[검증 결과] : 대체로 사실 아님

◇ 전범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 수는 사실과 다르다

1945년 11월 14일부터 1946년 10월 1일까지 열렸던 독일의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개별 책임으로 총 24명을, 그룹과 조직의 범죄로는 총 6개 그룹을 기소했다.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 기록 제1권(Nuremberg Trial Proceedings Vol. 1 Indictment)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24명 중 재판 전에 자살한 로베르트 라이 (Robert Ley), 병으로 심리가 정지된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보흘렌 운트 할바흐 (Gustav Georg Friedrich Maria Krupp von Bohlen und Halbach)의 경우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구스타프의 경우 병세가 회복될 때를 대비해 기소 취하를 하지 않았다.[12] 재판 전 자살한 로베르트 라이는 소송 조건이 없어졌기에 불기소 처분 중 하나인 공소권 없음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그의 개별적인 사건에 대한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다.[13]

따라서 법률 용어 ‘기소’의 사전적 의미가 형사사건에 대해 법원의 심판을 구하는 행위임을 미뤄봤을 때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개별적으로 기소된 인원은 자살로 공소권 무효가 된 로베르트 레이를 제외한 23명으로 규정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국어적인 의미에서 ‘기소’ 행위가 진행됐는지 여부로 논한다면 24명이 될 것이다. 해당 칼럼에 제시된 22명의 숫자는 사소하지만 사실과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기소된 사람 수에 대해서는 위 칼럼 뿐 아니라 국내 언론과 학술 논문에서도 22명, 23명, 24명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뉘른베르크재판소에 기소된 주요 전쟁범죄인은 22명이었다. 원래는 24명이었으나 한 명은 재판 전에 자살했고, 한 명은 병으로 심리가 정지됨으로써 2명이 탈락되었다.” (이장희, 2009)[14]

“2차대전이 끝나고 1945년부터 1946년 사이에 이뤄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독일군과 정부기관의 나치 지도자 24명이 기소돼 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KBS뉴스, 20/07/16)[15]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은 독일 제3제국의 제2인자이며 공군원수였던 괴링(H.Göring)을 필두로 한 23명을 피고인으로 하여, 1945년 11월 14일부터 1946년 10월 1일까지 진행되었다.” (양천수, 2011)[16]

때문에 22명으로 기재한 위 칼럼이 사실 왜곡의 의도를 지녔다고 판정하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일본 전범을 처벌한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에서 기소된 사람은 28명이다. 이는 기소장에도 밝혀져 있다.[17]

이 28명 중 재판 개정 이후 피고인 2명이 사망하고(나가노 오사미, 마쓰오카 요스케) 1명은 정신장애로 인한 소송능력 결여를 이유로 공소가 기각돼(오오카와 슈메이) 피고인은 최종적으로 25명으로 되었다.[18] 판결 이전 사망한 2명의 경우도 공소장에는 적시되지 않는 ‘공소 기각’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공소 기각은 공소에 대한 판결의 일부이기에 ‘기소 여부’로 두고 보았을 때 도쿄 재판에서 기소된 인물은 총 28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도쿄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이 25명이라는 문장은 엄밀하게 사실이 아니다.

이승만 정부는 559명을 체포하고 221명을 기소해 38명을 재판으로 처벌했다는 문장 자체는 대체로 사실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한 바 이승만 정부 시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는 1949년 8월 31일 공식 활동 종결까지 682건을 취급했다. 영장은 408건 발부했고, 체포 305건, 미체포 173건, 자수 61건이었다. 559건이 검찰에 송치됐으며 총 221건이 법정 기소됐다.[19]

정리하자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23명, 도쿄 재판에서는 28명, 이승만 정부에서는 221명이 기소됐으므로 해당 칼럼에서 인용한 수치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으로 결론 날 수 있다.

◇ 두 재판과 이승만 정부의 친일 청산 재판에 대한 단순 비교는 사실 왜곡의 가능성

뉘른베르크 재판과 도쿄 재판에서 기소된 사람 수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에 더불어 두 재판과 이승만 정부의 친일 청산의 재판을 단순히 숫자로 비교하는 것은 통계 오용, 사실 왜곡의 가능성이 있다. 해당 재판의 성격에 따른 차이와 후속조치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45년 제정된 유럽 주요전쟁범죄자 기소 및 처벌에 관한 협정과 이에 따라 수립된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법원에 관한 규약을 국제법적 기초로 진행됐다.[20] 그 이전에 망명정부간 준공식 협의체인 런던국제회의(LIA)은 1942년 4월부터 국제형사법원 설립협약 초안을 만들며 국내법원에 관할권이 없는 범죄로 독일 유대인에 대한 범죄와 피해국이 복수인 범죄를 제시했다. 이후 미영소 3국은 1943년 10월 30일 잔학행위에 대한 모스크바 선언에서 전후 독일의 일반전범은 피해국으로 송환해 사법처리하고, ‘특정 범죄지가 없는’ 수뇌부 처벌은 3국의 ‘공동결정’에 맡긴다고 발표하기도 했다.[21] 이 같이 뉘른베르크 재판은 국내법을 넘어 군수뇌부 등 주요전쟁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위해 고안된 재판이다.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서는 1949년까지 나치주요인물들이 재판을 받으며, 재판에 회부된 184명 중 5분의 4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외에 미군정 지역에서는 모두 1941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1517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 가운데 324명이 사형을 247명이 종신형 받았다. 영군정 지역에서는 1958명이, 프랑스 전령지역에서는 2107명이 재판에 회부됐다. 소련점령지역에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1950년까지 13,532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한 통계가 있다. 독일 점령 하 지역에서도 폴란드의 경우 1977년까지 5,358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벨기에에서는 75명, 덴마크 80명, 룩셈부르크 68명, 네덜란드 204명, 노르웨이 80명이 재판에 회부됐다.[22] 또 독일은 국내외입법을 통해 추후에도 전범 처벌을 할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했다.[23]

도쿄재판은 태평양 지역 연합국 최고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er) 원수의 1946년 1월 19일 ‘주일 연합군최고사령부는 극동국제군사법정에서 일본 전범재판조례를 선포하여 즉시 시행한다’는 ‘특별 선언’에 따라 일반명령 제1호로 ‘극동국제재판소 헌장’이 공포됐다. 해당 선언을 통해 연합국의 전쟁범죄인을 재판에 회부한다며 도쿄재판소가 설치됐다.[24] 이처럼 도쿄재판 또한 이승만 정부의 친일청산재판과 달리 국제법적 차원이다.

도쿄재판 이후의 조치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의 조치와 다소 다른 방향이다. 냉전 강화로 1948년 A급 전범 19명을 전원 석방하고 재판이 조기 종결됐다. 또 B,C급 전범은 ‘보통의 전쟁범죄’로 다뤄 7개국에 의해 2,244건, 피고 5,700명이 심판에 올랐다. 이 중 사형 984명, 종신형 475명, 유기형 2944명, 무기 1018명을 비롯해 279명은 기소철회 및 공소기각이 되었다.[25]

이승만 정부에서의 친일 청산을 위한 재판은 1948년 9월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이뤄졌다. 반민족행위특별법은 1948년 9월 제59차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26] 반민족행위처벌법 제2장 특별조사위원회에 따라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도 설치됐다.[27] 이후 1949년 4월 15일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 중지와 특경대 해산과 관련한 담화를 발표한다.[28] 결국 1949년 9월 21일 반민법 폐지안이 국회에 제출되며 친일 청산을 위한 이승만 정부의 활동이 마무리됐다.

이 같이 뉘른베르크 재판, 도쿄 재판, 이승만 정부의 친일 청산을 위한 재판은 해당 재판의 성격과 후속조치가 서로 각각 다르다. 또 각각 죄목도 다르다. 때문에 단순한 기소한 사람의 숫자를 두고 비교하며 ‘이승만 정부 친일 청산의 10분의 1이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해당 문장들과 내용은 팩트체크 결과 대체로 사실이 아님으로 판단된다.

장면 내각과의 비교[편집]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은 32%인데 4·19혁명 뒤 장면 정부에선 그 비율이 60%였다.

이승만 정부장면 정부에서의 일제 관료 출신 비율을 비교하고 있다. 해당 칼럼에서는 장면 내각에서의 일제 관료 출신 비율이 더 많은데 장면 내각을 계승한 민주당에서는 계속해 친일파 장사를 한다는 맥락에서 쓰였다. 통계 자료에 대한 근거가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검증 결과] : 판단 유보

◇ 정확히 부합하는 통계 자료를 찾기는 어려워

먼저 학술 논문을 중심으로 정부 내 관료 출신’에 대한 자료들을 찾았다. 강혜경(1998)의 연구에는 반민법에 따른 관직축출대상자에 해당하는 일제 고등관 3등 이상의 경력자가 30여명이나 정부의 고위직에 임용되었으며, 사법부 고위직 역시 68.4%가 일제 하의 판검사 출신으로 충원되었다는 자료가 인용되어 있다. 또한 해당 자료에서는 내무 공무원만 국한하여 약 400명 가량이 반민법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29] 김상묵.박흥식(2008)의 연구에서는 제1공화국 전 기간에 걸쳐 장·차관급 고위관료와 서울 및 부산 시장, 각도 지사에 임용되었던 160명의 경력을 보면, 총독부나 미군정시에 관료 출신이 69명(43%). 군인과 법조인까지 포함하면 101명(63%)라고 제시하고 있다. 또 1960년 4월까지 이승만 정부 12년 동안에 국무총리 이하 115명 (이중 재임 이상인 사람 19명을 제외하면)의 장관 중 31%(30명)이 일제관료 출신이라는 자료가 나타난다.[30]

위 칼럼에서의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 이라는 표현은 해석의 범위가 넓다. 어느 직급, 분야의 관료인지에 대해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아 이에 대한 근거 자료는 비슷한 통계 수치를 가지고 있는 자료를 찾는 방식으로 추정했다. 위의 국무총리 이하 115명에 대한 자료의 수치가 31%로 칼럼에서 언급한 32%와 가장 근접했다.

‘장면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 비율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2014년도 제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 구술채록사업 최종결과보고서에는 장면 내각을 구성한 민주당 신파들도 일제 관료 출신이 다수라는 언급이 있었다.[31] 박수현(2011)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친일인물 중 해방 이후 주요 인물들로 추출해 각 정권별로 정리했다. 이 자료는 행정사법입법, 군 검찰, 교육언론기타 등의 분야로 나눠 친일인를 분류했다.[32]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은 32%인데 4·19혁명 뒤 장면 정부에선 그 비율이 60%였다’가 어떤 자료를 보고 나타난 수치인지는 파악하지 못해서 간접적으로 해당 수치의 신뢰 가능성 대해 파악해봤다. 이승만 정부 12년 동안에 국무총리 이하 115명의 장관 중 31%가 일제 관료 출신이라는 자료가 32%와 가장 근접했기에 장면 정부에서도 국무총리 이하 장관 중 일제 관료 출신 비율을 따져봄으로써 검증을 해보았다. 검증을 위해서 인물에 대한 정보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고했다.[33] 또 일제 관료로 구분 짓는 기준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본제국직원록 조선총독부편을 기준으로 했다.[34]

이승만 정부 내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 115명 (이 중 재임 이상인 사람 19명 제외하면) 중 일제 관료 출신 30명, 친일 인명 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16명으로 나타났다.

일제 관료 출신 총 30명 황호현, 백한성, 김형근, 이익흥, 장경근, 이근직, 홍진기, 이호, 박희현, 이우익, 조진만, 조용순, 신태영, 김정렬, 이종찬, 신현확, 전예용, 임문환, 신중목, 정재설, 이해익, 정낙훈, 정운갑, 박히현, 구용서, 김영찬, 김석관, 김일환, 이응준, 곽의영
친일 인명 사전 등재 총 16명 윤치영, 백한성, 김형근, 장경근, 이근직, 홍진기, 이호, 박희현, 조진만, 조용순, 신태영, 이종찬, 전예용, 임문환, 이해익, 김일환

같은 기준으로 장면 정부(내각) 내 국무위원 33명 (이 중 재임 이상인 사람 7명 제외하면) 중 일제 관료 출신 9명, 친일 인명 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6명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장면 내각 내 국무위원 중 일제 관료 출신 비율은 약 35%로 볼 수 있다.

일제 관료 출신 총 9명 현석호, 조재천, 김영선, 김우평, 박제환, 이태용, 김판술, 박해정, 한통숙
친일 인명 사전 등재 총 6명 현석호, 조재천, 김영선, 김우평, 주요한, 이태용

따라서 “이승만 정부 내 일제 관료 출신은 32%인데 4·19혁명 뒤 장면 정부에선 그 비율이 60%였다.”는 내용의 통계 자료가 정부 내 국무위원을 대상으로 한다면 사실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문장 안에는 국무위원을 대상인지, 정부 내 어떤 직책을 대상으로 하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타나있지 않다. 보다 정확한 팩트체크를 위해서는 먼저 해당 통계를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에 대해 칼럼 작성자에게 직접 물어 해당 자료에 대한 팩트체크를 진행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현 시점에서는 판단 유보가 필요하다.

같이보기[편집]

출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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