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고영근의 호패와 명판’ 등록문화재로 등록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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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9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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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는 고영근의 증손자가 소장하고 있던 고영근의 호패(號牌) 2점과 명판(名板) 2점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을 27일 문화재청에 신청했다고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고영근(高永根, 1852년 또는 1855년~1923년)은 대한제국 시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회장을 지냈고,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우범선(禹範善)을 암살한 대한제국의 무관이다. 그는 윤치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회(民會) 도입을 추진하고, 대한제국의 비자주적 외교와 친러정권을 통한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며 국정개혁안인 《헌의6조》를 고종에게 제출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번에 등록 신청된 고영근의 호패는 1887년 서각(犀角 : 무소의 뿔)으로 제작된 것과 1889년 상아로 제작된 것 두 가지다. 서울시는 이 가운데 상아로 만든 호패는 앞면 윗부분에 ‘高永根’이라는 이름을 새기고, 하단에는 오른쪽에 ‘壬子生’, 왼쪽에 ‘丁亥武科’라고 새겨 출생연도(1852년)와 무과에 합격한 연도(1887년)를 알려주고 있다고 밝혔다. 뒷면에는 ‘己丑’이라고 새겨져 있어 무과에 합격한 뒤 2년 지난 1889년에 호패를 만들었음을 알려준다. 아래에는 사각형의 발급기관의 낙인(烙印)이 찍혀 있다.

한편 서각으로 만든 직육면체 형태의 호패 역시 앞면에 ‘高永根’, ‘壬子生’, ‘武科’라고 새겨져 있어 이름과 출생년도, 무과 합격사실을 알려준다. 뒷면에는 ‘丁亥’라고 새겨 이 호패가 1887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패는 오늘날의 신분증과 비슷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모든 계층의 16세 이상 남자가 차고 다녔다.

또한 호패와 함께 문화재 등록이 신청된 명판은 오늘날 ‘도장’과 같은 성격의 유물이다. 고영근의 명판 2점은 나무로 제작되었는데, 한 점은 8각형의 나무판에 이름을 제외한 면을 파내고 ‘高永根’이라는 이름만 돋을새김 한 단순한 형태이고, 또 한 점은 중앙에 손잡이를 달고 윗면에 ‘上’자를 새겨 위·아래를 구분할 수 있게 제작되었다.

이번에 고영근의 호패를 문화재 등록 신청하게 된 것에 대해 서울시는 이 유물이 조선시대 호패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작년 12월 16일 개최된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에서는 <고영근 호패와 명판>이 근대시기에 제작되어 현시점에서 지정문화재로까지 지정하기는 어렵지만 “대한제국이 재평가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고영근이라는 인물 자체가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을 암살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홍능의 능참봉으로서 ‘고종태황제’라고 하는 비명을 새긴 고종황제의 석비를 세워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근대의 역사적 인물임을 적극 감안해 그와 관련된 유물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의결하였다.

한편 서울시는 고영근 호패와 명판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됨으로써 국민들이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격동의 근대사와 이 시기를 살아나간 역사적 인물들의 활동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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